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무 덴노 (문단 편집) ==== [[불교]] ==== 이미 즉위 전에 요시노로 낙향하기에 앞서, 승려로서 출가했던 경력이 있었던 천황은 재위 2년([[673년]]) 3월에 가와라데라(川原寺)에서 《일체경》(一切經)을 필사하게 하는 대규모 [[사경]] 작업을 행했다. 5년(676년)에는 전국에 사자를 파견해 《금광명경》(金光明經)과 《인왕경》(仁王經)을 설법하게 했으며, 8년(679년)에는 궁중 및 야마토쿄(倭京)의 24개 절에서 《금광명경》을 설법하게 했다. 사원 건립에 있어서는 《일체경》사경을 명했던 덴무 2년([[673년]]) 12월 17일에 미노노 오오키미와 기노 가타마로(紀訶多麻呂)를 조고시대사사(造高市大寺司)에 임명하고 선대 조메이 천황이 지었던 백제대사(百濟大寺)를 다케치(高市)로 옮겨 다카이치노오테라(高市大寺, 고시대사)로 삼았다. 9년(680년) 11월 12일에 황후의 병에 임해 [[야쿠시지]](藥師寺) 건립을 기원하기도 했으며, 그 자신의 병에 즈음해서도 여러 가지로 불교에 의지하는 등의 방식으로 쾌유를 바랐다. 덴무 14년([[685년]]) 3월 27일, 천황은 집집마다 불사(佛舍)를 짓고 예배·공양하라는 조를 내렸다[* 여기서의 '집'이 어느 정도의 인원수의 단위인가는 불명하지만, 불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.]. 이 무렵까지 기나이를 제외하고 다른 지방에 불교 사찰의 수는 적었지만, 덴무·지토 조에 이르러 전국에 우지데라(氏寺, 씨사)가 활발히 축조되었다. 유적에서 발굴된 기와를 통해, 중앙에 위치한 소수의 사찰마다 지역을 분담해 건설을 지도하는 등 정책적인 지지가 이루어졌음을 상정할 수 있다{불교사학자 다무라 엔츄(田村圓澄)의 설}. 그러나 이러한 천황의 불교 보호는 승려들에게 '''사찰에 틀어박혀 천황이나 국가를 위한 기도에 전념할 것을 요구'''하는 것으로, 불교를 국가에 종속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. [[국가신토]]가 너무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견제하고자 했던 천황의 '국가불교'인 셈이었다. 덴무 4년에 여러 사찰에 내려졌던 산림과 천택을 거두어들이고 8년에는 식봉을 내리는 등 사찰의 수입을 국가가 관리하기도 했다. 중앙통제기관으로는 [[스이코 천황]]때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던[* 스이코 천황에게 이러한 직책의 설치를 주장한 것이 백제의 승려 [[관륵]]이었다.] 승정·승도 등을 부활시켜 '''승강제를 정비했다'''. 천황의 불교 이해나 그 대하는 자세도 '''내세보다는 현세에서의 이익을 추구한 피상적인 것이었다'''는 지적이 있다. 대표적인 예로 천황이 수도와 각 지방의 사찰에서 설법하게 한 것은 《금광명경》이나 《인왕경》같은 호국불교적 사상에서 중시하는 경전으로, 개인의 구제나 불교적인 깨달음을 얻는 데에 관심했다는 증거는 없다. 덴무 천황 개인의 입장에서 불교에 요구한 것은 황후와 자신의 병이 낫게 하려는 [[기복신앙|기복]]일 뿐, 딱히 불교의 깊은 뜻을 따르고자 하지는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